
일찍 닫는 상점에 부딪치며 달라진 생활의 리듬
유럽은 기본적으로 한국보다 위도가 높아 낮과 밤의 풍경이 매우 다릅니다. 겨울은 한국보다 낮이 짧은 반면, 여름은 해가 아주 길어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북유럽처럼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예전에 살았던 북유럽의 한 도시에서는 한여름이면 밤 10-11시가 되어서야 해가 지고, 새벽 3-4시 쯤이면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밤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어둠이 짧았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벨기에에서도 여름이면 저녁 9시가 되어도 밖이 훤한 날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럽에서 생활하다 보면 밖은 아직 환한데 하루가 일찍 끝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해가 져서가 아닙니다. 상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며 인적이 드물어지기 때문입니다.
식당이나 펍이 모여 있는 거리, 관광객이 많은 도심을 제외하면 저녁이 되면서 거리도 조금씩 조용해집니다.
한국에서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진 상점과 편의점, 카페와 식당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처음에는 꽤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풍경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이 생겼을 때였습니다.
1. 필요한 것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시간
저녁에 필요한 물건이 생각나 급하게 사러 나갔는데 상점이 이미 문을 닫은 적이 여럿 있었습니다.
특히 일요일에는 더 난감한 경우가 생깁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아이가 말합니다.
“아빠, 내일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이 있어.”
그런데 집에 없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일요일 저녁에 급하게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을 검색하는 건 대개 무의미한 일이 되곤 합니다.
한국에서라면 일단 어디서 살 수 있는지부터 찾아봤을 겁니다. 한 곳이 문을 닫혔더라도 다른 가게를 찾으면 그만이니까요.
애초에 일요일에 문을 연 곳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럴 때는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몇 번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필요한 것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
2. 일요일만 기억해서도 안 됩니다
처음에는 일요일만 기억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토요일에 필요한 것을 사두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활하다 보면 달력을 한 번 더 보게 됩니다.
공휴일 때문입니다.
공휴일이 주말과 이어지면 평소처럼 장을 보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기 어려운 시간이 길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이나 토요일이면 다음 며칠 동안 필요한 것이 없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이런 질문도 하게 됐습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 없어?”
대단한 생활의 지혜는 아닙니다.
조금 먼저 확인하고, 조금 먼저 준비하는 것.
결국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유럽이라고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국가와 지역, 상점에 따라 영업시간이 다르고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도 문을 여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가는 곳이라면 상점의 영업시간과 공휴일을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3. 불편함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래 산다고 해서 이런 불편함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있는데 살 수 없으면 여전히 불편합니다.
그 불편함을 굳이 아름답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달라진 것은 유럽의 상점이 아니라 내가 생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때 해결하는 데 익숙했던 생활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 먼저 생각하는 생활로 바뀌었습니다.
금요일이면 주말을 한 번 생각하고, 공휴일이 다가오면 달력을 한 번 더 봅니다.
유럽의 상점들이 나에게 맞춰 문을 늦게 닫은 것은 아닙니다.
내가 조금 먼저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아직 밝은데 하루가 끝납니다
여름 저녁, 밖은 여전히 밝습니다.
쇼윈도에는 물건들이 그대로 보이지만 문은 닫혀 있고, 식당이나 펍을 제외하면 거리도 조금씩 조용해집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낯설었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불편합니다.
하지만 몇 번의 일요일과 공휴일을 보내면서 나에게 작은 습관 하나가 생겼습니다.
내일 필요한 것은 없을까.
다른 곳에서 오래 살아간다는 것은 그곳의 모든 것이 좋아진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불편한 것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다만 그곳의 시간을 알아가고, 그 시간에 맞춰 내 생활의 리듬을 조금씩 바꾸어가는 것.
어쩌면 그것도 다른 곳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밖은 아직 환하지만 상점의 문은 이미 닫혀 있습니다.
그렇게 유럽의 밤은 조금 일찍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