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유럽을 방문한 것은 2001년으로 기억합니다.
영국에서 시작해서 프랑스와 독일을 거쳐 덴마크로 갔고, 다시 독일로 돌아와 한국으로 귀국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의 유럽 여행에서 가장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나라를 옮길 때마다 돈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파운드, 프랑스에서는 프랑, 독일에서는 마르크, 그리고 덴마크에서는 크로네를 썼습니다.
유로는 이미 공식 출범해 있었지만, 지금처럼 유로 지폐와 동전을 사용하기 전이었습니다.
나라가 바뀔 때마다 최대한 소진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미리 환전을 해와서 그런지 각 나라 화폐를 쓰는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온 저에게 더 낯설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다른 나라로 쉽게 건너간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가려면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하는데, 유럽에서는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나라에 도착해 있습니다.
국경을 넘으며 잠들다
파리에서 하이델베르크로 갈 때, 야간열차를 이용했습니다.
20년도 훨씬 지난 일이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잠들기 전 승무원에게 여권을 맡겼다가 다음 날 아침에 돌려받았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절차 없이 다음 날 아침 일찍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습니다.
이른 아침 낯선 도시에 내려, 출근하는 듯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한 빵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처럼 커피 한 잔과 빵으로 아침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몇 년 뒤, 다시 온 유럽
몇 년이 지난 2004년, 다시 유럽에 왔습니다. 이번에는 여행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이 가장 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는 돈이었습니다. 지난 여행에서 사용했던 프랑스의 프랑과 독일의 마르크가 더 이상 쓰이지 않았고, 대신 유로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바뀔 때마다 환전을 하거나 남은 동전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국경을 넘는 여행도 훨씬 편해졌습니다.
다만 제가 살게 된 스웨덴에서는 여전히 자국 통화인 크로나(SEK)를 사용했습니다. 스웨덴은 2003년 국민투표로 유로 도입을 부결한 뒤 크로나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같은 돈을 쓰게 되었지만, 유럽 전체가 하나의 돈을 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라진 국경을 찾아서
스웨덴에 살면서 자동차로 노르웨이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신기하고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경에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너무 평범했습니다.
의식하지 않고 운전했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특별했던 국경으로 기억됩니다.
다행히 Svinesund Bridge를 건너기 전에 차를 멈추고 아래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 속 다리 건너편이 노르웨이입니다.
지금 보면 별것 없는 평범한 디지털 카메라 사진이지만, 볼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아직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국경을 그냥 지나칩니다
지금은 벨기에에서 차를 타고 독일이나 프랑스, 네덜란드로 가는 일이 특별하지 않습니다.
운전하다 보면 정확히 언제 벨기에를 벗어났는지도 모른 채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국경을 놓칠까 봐 표지판을 일부러 찾곤 했는데, 이제는 굳이 찾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오히려 다른 경계들을 미리 확인해야 합니다.
Schengen 안인지 밖인지, Eurozone인지 아닌지, EU/EEA 로밍은 그대로 적용되는지 등을 살펴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eSIM을 별도로 준비하기도 합니다.
도로 위의 국경은 잘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여행을 준비하며 확인해야 할 경계는 오히려 더 다양해졌습니다.
유럽의 다양한 경계가 궁금하다면 「유럽의 다양한 경계선 — EU, EEA, Eurozone, Schengen」
사라졌던 국경이 다시 나타날 때
그렇다고 유럽의 국경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COVID-19 시기에는 유럽을 오가며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던 내부 국경이 다시 통제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6년 4월, 독일로 자동차를 타고 들어갈 때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갔을 국경 부근에서 차로가 하나로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차들이 속도를 줄여 한 줄로 지나갔고, 설치된 카메라 앞을 천천히 통과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Schengen 내부의 육상 국경에서 임시 국경통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없어진 줄 알았던 국경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순간이었습니다.
처음 유럽을 여행했을 때는 길 위에서 국경을 찾았습니다.
자동차로 국경을 넘는 것이 신기해서 가던 길에 차를 세우고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국경을 넘었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지나칠 때가 훨씬 많습니다.
대신 이제는 여행을 떠나기 전, 지도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경계들을 미리 찾아보곤 합니다.
국가 사이의 경계선은 흐려졌지만, 연합의 테두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글과 함께 읽기 — 하나의 유럽, 네 개의 경계선
- 하나로 묶인 유럽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테두리가 궁금하다면 → 「하나의 유럽, 네 개의 경계선 — EU, EEA, Eurozone, Schengen」
- 실제로 여행 중에 이러한 경계를 만난 경험이 궁금하다면 →「하나의 유럽, 네 개의 경계선 — 희미해진 국경선, 남아 있는 테두리」
- 하나로 묶인 유럽에 왜 서로 다른 경계가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면 → 「하나의 유럽, 네 개의 경계선 — 연합 그리고 남겨진 차집합」